한국사

소빙기 재난과 국가의 대응

우기부기87 2023. 2. 3. 17:26

<조선왕조실록>의 천재지변 기록을 분석하면 전체 기간의 65%에 해당하는 1490년부터 1760년까지의 기록이 83%를 차지한다. 근 270년간 유성의 잦은 출현과 우주먼지가 대기권에 찬 상태에서 천둥번개, 지진, 시리, 이상기온등의 천재지변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간 소빙기, 17세기 위기론 등으로 거론된 장기 자연재난이 실록 기록의 분석을 통하여 존속 기간과 함께 재난의 원인이 유성 낙하, 곧 외계 충격 현상이란 것이 밝혀졌다.

전 지구적 현상이었던 소빙기의 재난은 동아시아 각국에서도 실농과 폐농, 이로 인한 사회적 동요 속에서 대소 규모의 외침이 잦게 발생하였다. 일본 전역이 전국이 된 상태에서 연안 주민들이 왜구가 되어 조선과 명나라의 연안 지역에 출몰하고 북쪽의 야인이 남하하여 충돌을 일으켰다. 조선왕조는 비변사란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기근에 대한 진휼, 왜구의 잦은 출현과 북방 여진족의 남하에 대한 응급대책을 수립하였다. 비변사는 1510년경에 처음 이름이 생기고 1517년경 조직을 갖추었으며, 1554년에는 상설 관아가 되어 의정부와 함께 정1품 아문으로 정착하였다. 비변사는 도제조, 부제조, 낭청의 세 부류 관원으로 구성되었는데, 비변사의 제조 이상이 주로 회의 기능을 담당하였다면, 유사당상과 구관당상은 직무 분장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자연재해가 몰고 온 가장 큰 고통은 기근과 질병이었다. 거듭된 자연재해로 기근이 자주 발생하자, 처음에는 상평창제도의 시행으로 이에 대처하였으나 전세 수입, 공납, 공노비의 신공 등 진휼 재원으로 전용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자랄 정도였다. 남은 방법은 민간의 여유곡을 동원하는 것밖에 없었다. 1550년 전후에 관에서 곡식을 받고 신분을 올려 주거나 관직을 주는 방안으로 납속공명첩제도가 도입되었다. 납속공명첩은 부정한 매관매직이 아니라 민간의 사곡을 구휼곡으로 동원할 목적으로 발행되었다.

자연재해의 빈발에 따라 전염병 기록의 빈도수도 급증하였다. 왕실로서는 의술의 개발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왕명으로 편찬된 허준의 <동의보감>은 이 시기의 극심한 질병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술적 노력의 대표적 저작이었다. 이 의서는 대중적 활용에 목적을 두어 싼값의 토산 약재의 활용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임진왜란은 기근 속에서 진행되어 전란 중에도 진휼청이 가동되었다. 인조 4년에는 구황청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이후에도 기온이 내려가고 홍수가 심했으며 전염병이 크게 돌아 대규모 인명피해가 났다. 1663년에는 진휼청을 다시 설치하고, 구황사목을 마련하여, 각지에서 모여든 기민에게 공곡을 나누어 주었다. 1670년의 재해는 소빙기 기간 중 가장 혹심하여 실제 사망자는 100만 명이 넘었다. 진휼청은 왕궁 앞 비변사에 본청을 두고 용산강의 군자창, 풍저창 등의 관창 주변에 강창을 설치하여 기민이 먹을 것을 찾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국가는 구황식에 관한 정보 제공에도 노력하였다. 세종 때 편찬된 <구황벽곡방>을 토대로 명종 때 <구황촬요>, 효종 때 신숙이 지은 <농가집성>에 붙은 <구황촬요>에 여러 구황책이 마련되었다.

소빙기의 기온 강하는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와, 잦은 실농으로 식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생긴 한편, 주거와 의류에는 보온이 절대적으로 강화되어야 했다. 온돌은 지금까지 쪽구들이 일반적이었는데, 17세기에 전면 온돌로 바뀌어 널리 보급되었다. 1363년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씨를 가져와 보급한 목화는 소빙기에 급속하게 보급되었다.

16세기 이후 자연재해와 전란은 인구의 추이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 초기에 농업기술과 의술의 발달로 인구가 상승하여 16세기 중반에 실제 인구수가 900만 명 내지 1000만 명에 이르렀으나 16세기의 자연재해와 임진왜란으로 급감하기 시작하여 700만 명 선까지 내려갔다. 

현종시대 이후로도 호적상의 호구 수가 감소하였다. 재난이 그치지 않자 현종 때 과도하게 파악된 역총, 즉 군적에 오른 양정의 숫자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양역변통론이 강력하게 제기되었다. 경신대기근 이후로는 역총, 곧 양역 의무자 수가 약 100만 명으로 고정된 가운데 소규모의 간헐적인 증감만 있었다. 

숙종 때에는 소민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에 박차를 가하였다. 효종 2년에 호서에서 처음 시행된 대동법을 다른 도에도 확대, 시행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양전사업을 벌여 황해도와 경사도 등지에도 확대, 시행하였다. 공물로 현물로 받지 않고 경작하는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이나 면포로 내게 하여 중간 작폐를 크게 줄였다. 이 무렵에 군제 변통이 행해져 중앙 군영의 전면적 개편과 함께 군역 의무자의 수를 감축하였다. 이런 개혁 조치가 이루어지면서 1700년 전후부터 인구의 진정한 회복세가 시작되었고, 18세기 초부터 인구가 상승곡선을 긋기 시작하였다.

농경지도 인구의 추이와 궤를 같이하는 변화를 겪었다. 세종 때의 수세 전결 수는 160~170만 결이었는데, 16세기에 자연재해의 장기화로 많은 경작지가 버려져 진전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1년의 첫 토지조사에서 전국 전결수는 30만 결로 급감하였다. 전결 수의 감소는 국가 재정의 결핍을 의미하였다. 조정은 호구조사와 마찬가지로 전결 수를 늘리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1635년에는 45만 결을 더 확보하여 90만 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목표액에 불과하였고, 광해군에서 현종 연간에는 실제로 경작하여 전세를 부과할 수 있는 토지는 50~60만 결 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실제로 경작 토지가 100만 결을 넘어선 것은 숙종 때였다. 국가는 지방장관의 책임 아래 농민에게 종자, 농기구, 농우 등을 대여하면서 재개간을 독려하고, 개간한 진전에 대해 국가는 3년간의 면세를 법으로 보장하였다. 1700년대 전후에 경작이 가능한 토지 결수가 100만 결을 상회할 정도로 회복된 것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출처 - 한국사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