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이야기
한반도와 남만주 일대에서 농경이 행해지고, 이어서 청동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새로운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정착 농경 생활의 진전됨에 따라 점차 한 씨족 내에서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여러 쌍의 부부 가족들로 구성된 친족집단이 생산과 소비의 기본 단위가 되었고, 그렇게 친족집단이 모여 촌락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나아가 촌락공동체 내에서 친족집단 간에 경제적 우열이 생기고, 비옥한 식량 등 유용한 주요 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촌락 공동체들 사이에도 그러한 갈등이 일어났다. 그런 가운데 촌락공동체 간의 문제를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더 큰 결합 단위로서 부족의 기능이 더욱 커졌다. 부족장은 씨족이나 친족 집단의 장들에 의해 선임되었고, 그들은 지도자였다.
부족 통합기능의 중심이었던 조상신이나 자연신 등에 대한 제사와 축제를 겸한 제의였고, 부족장은 제사장으로서의 권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부족 내의 여러 집단 간의 경제적인 우열이 현저해지고, 주요 자원의 이용권에 대한 갈등도 날로 심해졌다.
이에 한반도와 중남부 만주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는 새로운 정치 조직의 형성을 향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선 집단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지위를 가속화하고, 열세한 집단에 대한 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였고, 외부 다른 세력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조직된 국가였다.
초기국가는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예. 맥. 한족 사회에서 진행되던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 중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것이 조선이었다. 이 조선은 후대의 이 씨 왕조의 조선과 구분을 위해 고조선이라고 한다.
이 고조선이란 용어는 근대에 들어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했고, 그전 조선시대에서는 흔히 단군조선, 위만조선, 기자조선으로 명명하고 사용했다
고조선의 존재는 [관자]라는 문헌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관자]에는 제와 조선 간의 교역에 관해 간단한 언급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관자]는 기원전 7세기에 제나라의 재상이었던 관중의 저술이라고 가탁했으나, 실제 그 주된 내용은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들의 저술이었다. 그런 만큼 이에 의거해 고조선의 등장 시기를 논단할 수는 없다. 더욱 구체적으로 이에 대한 언급을 담은 것이 바로 [전국책]의 기록이다. [전국책]에 따르면 소진이 연 문후에게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라고 말했다. 같은 내용은 [사기]에도 전해진다. 또한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 소왕 이전 시기에는 조선과 연나라가 각축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곧 고조선이 최소한 기원전 4세기 이전에 등장하여 연나라와 제나라와 교섭하면서 상당한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고조선의 등장과 정치적인 성장정도는 고조선의 중심지역과 그곳에서 출토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시기를 단군신화에 의거하면 기원전 2333년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기년은 어디까지나 고려시기 사람들이 우리역사의 기원이 중국에 못지않게 빠르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설정일 뿐,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그리고 근래 평양시 동편의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 있는 '단군릉'에서 나온 인골을 전자상자성공명법에 의거해 연대측정을 해보니 5000여 년 전의 것이라는 , 곧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이 5000여 년 전에 생존해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다. 국가의 형성은 농경과 청동기의 사용 이후에 가능한데,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10세기 전후 무렵부터였다.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의견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왔다.
이는 '재평양설', '재요녕성설', '이동설' 로 크게 나뉜다.
'재평양설'은 고조선의 중심지가 평양이 시종 중심지였다는 주장이며, '재요녕성설'은 시종 요녕성 지역에 존재했다는 설이고, '이동설'은 초기 중심지는 요하유역이었다가 기원전 3세기 전반 이후 평양으로 중심지 이동이 있었다는 설이다. 북한 학계에서는 재요녕성설이 정설로 공인되어 오다가 1993년 '단군릉' 발굴 이후 혼란상태로 빠져들었다. 남한 학계에서는 세 가지 설 모두 제기되어 있다.
논란이 분분한 고조선의 중심지 위치를 비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대적으로 더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는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또한 요하 유역으로 보는 설과 평양으로 보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선 실물유적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 연. 진. 한나라 때 만리장성의 위치가 주위 된다. [사기]에 따르면 진시황 때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요동의 양평에 이른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요녕성 북부 지역 일대에 진나라, 한나라 때의 장성의 유적 일부가 뚜렷이 남아 있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장성의 동쪽 끝인 양평에 중심을 둔 요동군은 오늘날의 요하 하류 유역임이 분명하다. 고조선의 중심지가 시종일관 요녕성 지역에 있었다는 논자들의 공통된 입론의 출발점은 진나라, 한나라시대 장성의 동쪽 끝이 오늘날의 산하이관부근이라는 데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산하이관은 현존하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데, 현재의 장성은 진나라, 한나라 시대의 장성보다 훨씬 남쪽에 세워진 것으로 후대의 것이다. 요동군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었으므로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한반도의 서북부 지역이 된다. 낙랑군 조선현은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이후 그 위치가 변동된 적이 없다. 조선현의 치소가 이곳이라면 자연 위만조선의 왕검성과 그전 시기 고조선의 서울도 이곳 평양이 된다.
그런데 문헌상으로 보면 고조선이란 나라는 늦어도 기원전 4세기 이전에 등장하여 고대 중국의 제나라와 교역했고, 기원전 4세기 전반 연나라와 각축을 벌였다. 그러나 평양 지역 일대에서 출토되는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은 에임부분을 지닌 세형동검이다, 이런 세형동검문화는 그 연대의 상한이 기원전 3세기 내지는 기원전 4세기 후반을 넘지 못한다. 평양 지역에서는 이보다 앞서는 시기의 청동기 유물도 출토되었지만 소량에 불과하고 빈약하다. 그 정도의 금속기문명으로서는 연나라와 각축했다고 문헌상에 전하는 고조선의 면모와는 부합되지 않는다. 그런데 연나라의 소왕 때 고조선의 연나라와 싸워 패배하고 그 서쪽의 영역을 크게 상실했다고 전한다. 그 무렵이 세형동검문화의 상한 시기와 근접하였다. 그리고 세형동검의 원형인 비파형 동검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이 만주의 요녕성 지역이고, 그중 요하 이동 지역에서 비파형 동검과 탁자형 고인돌무덤 및 미송리형 토기 등이 함께 확인된다.
출처 - 한국사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