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해방과 38선 분할

우기부기87 2023. 2. 8. 21:14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연합국의 대일전 승리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지만, 그러한 역사적 사변을 맞이하기 위해서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장기간 국내외에서 간고한 투쟁을 벌이며 피를 흘렸던 것 또한 사실이다

1940년대에 들어 해외 각지의 한인 민족해방운동세력은 연합국과 공동으로 대일작전을 수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재국 정부 또는 해당 지역 정치세력과 긴밀하게 연계하였다.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과 미군 OSS는 한반도 진공작전을 준비하였고, 또 OSS는 일본군 내 한인포로들과 재미 한인들을 요원으로 훈련시켜 국내에 침투시키려던 작전을 통해 미주의 한인 민족해방운동세력과 연대하였다. 이 시기에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세력은 소련령 하바로프스크 브야츠크로 건너가서 소련과 연계 아래 88교도려를 조직하고, 군정학습과 적후 정찰활동 등 소부대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1945년 8월 8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후 소련군이 만주와 한반도로 진격할 때 길 안내 등 선발대 역할을 하였다. 연안이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역시 중국공산당 팔로군과 대일전을 수행하는 한편, 군정학습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광복군은 중국국민당군과 함께 대일전을 수행하였고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 이래 중국국민당은 임정의 재정적 후원자 중 하나였다. 해외 각 지역의 한인 민족해방운동세력은 비록 독자적인 작전전개 능력을 가지지 못하였지만 해방 직전 부분적이나마 공동 무장활동을 통하여 일제를 향한 연합국의 반제반파쇼투쟁에 동참하였다.

국내와 국외의 민족해방운동세력들은 이 시기에 상호 연계를 위한 모색과 시도를 계속하였다. 중국에서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임정이 장건상을 매개로 하여 연대를 시도하였다. 임정과 만주의 김일성 등 항일무장투쟁세력 사이에서도 연대를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성사되지 못하였다. 한편 임정은 국내와 연계를 위해 1944년 10월 국무위원회 결의로 국내공작위원회를 설치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하지만 임정은 국내와 연계를 위해 몇 차례 국내에 공작원을 파견하였다. 국내의 민족해방운동세력 가운데 여운형이 이끈 조선건국동맹은 적극적으로 국외의 혁명운동세력과 연계를 모색하였다. 특히 1945년 5월 말 북경에 파견된 최근우는 임정 요인과의 접촉은 실패하였지만 연안의 독립동맹과 연계를 성사시켰다.

태평양전쟁 말기 국내외 민족해방운동세력들 사이에 이루어진 산발적인 연계 시도는 대부분 조직적 결합으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이 시기 각 세력이 해방을 앞두고 단일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의 연계 시도는 각 세력이 정치적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졌고, 당파적 요구가 배제되지 않은 채 이루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념과 노선 대신 대일항쟁을 위한 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앞세우고 좌우합작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이 시기의 역사적 경험은 해방 이후 민족분열의 위기가 현실화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되살아났다.

일본의 패전으로 동아시아에서 반제반파쇼투쟁은 민주주의 세력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대항한 반파시즘 진영은 한 힘이 아니었고, 일제의 무조건 항복은 여러 세력의 공동노력의 결과였다. 반파시즘 진영은 자본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미국, 사회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소련, 반제반일투쟁 과정에서 성장한 동아이사의 민족해방운동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세력들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붕괴 후 동아시아의 전후 신질서를 놓고 내부 대립과 세력 재편을 겪게 된다. 이미 대일전 수행과정에서부터 미국의 전후처리방안을 놓고 미국, 영국, 중국, 소련 사이에 이해관계의 대립이 잠복해 있었고, 이들 사이에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장과 주도권 확보를 위한 견제와 경쟁이 계속되었다. 또 한반도의 민족해방운동세력 역시 전후 독자적인 국가건설노선을 가지고 강대국의 구상과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태평양전쟁에서 일제가 대항해 연합국의 군사적 대응을 주도한 미국은 전후 동아시아질서 재편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해방 이전 미국은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문제 해결의 일반적 방침으로 신탁통치안을 마련하였다. 미국은 카이로회담, 얄타회담, 포츠담회담 등 전시 연합국 회담에서 영국, 중국, 소련으로부터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한 동의를 얻어 내려고 하였고, 종전이 다가오면서 특히 소련으로부터 확약을 받아 두려고 하였다. 전후 한국의 장래에 대한 최초의 국제공약인 카이로선언의 한국 조항"조선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절차를 거쳐' 조선을 자주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라는 미국의 주도적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영국, 중국, 소련은 한국의 독립에 대해 원칙적 동의를 표시했을 뿐 미국은 신탁통치 안에 대해서 종전까지 명문화된 국제적 협정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한편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과 군사적으로 대항한 것은 주로 미국이었으며, 다른 연합국들의 전쟁수행에서도 미국의 군비 지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막강한 소련 지상군의 존재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동북아시아에 초래할 정치적 영향력을 미국으로서는 우려할 만하였다. 미국 군부는 이러한 불투명성에 대비해 한반도에 대한 연합국 공동점령, 공동시정 방침 내지 분할점령안을 마련하였다. 38도선 분할점령도 이러한 고려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과 현실적인 군사력 배치상의 애로, 소련의 대응을 조화시키기 위해 나왔다.

해방 이전 소련의 동북아시아 정책에서도 한반도 지역은 결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련은 대일전 참전에 앞서 이 지역에 소련과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해방 이전에 만들어진 소련 외무성의 한 보고서는 "한국이 장차 일본만이 아니라 극동으로부터 소련에 압박을 가하려는 임의의 다른 강대국이 소련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전환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독립은 효과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과 한국의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독립과 소련 극동 지역의 안전을 보증하는 더 현실적이고 올바른 방안이 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만주, 한반도 진공은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들로 방어망을 구축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출처 - 한국사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