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후삼국시대 이야기

우기부기87 2023. 1. 27. 22:50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의 역사를 상대 중대 하대 세 시기로 구분을 하였는데, 중대는 신라의 전성기로 무열왕의 직계자손들에 의한 왕권의 전제성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중대 말경인 경덕왕 때 와서는 왕권의 강화도 한계점에 도달하여 방계의 진골귀족들이 다시 대두하게 되었다. 신라의 정치와 사회운영의 기본원리로 기능하던 골품제도가 모순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경덕왕은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무열왕 이후부터 추진해 왔던 귀족세력의 억제를 위한 최후의 시도로서 한화정책을 근간으로 하는 정치개혁을 실시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다음 대인 혜공왕 때 마침내 골품제도의 모순은 커다란 반란으로 폭발하였다. 혜공왕은 96각간의 내란과 같은 방계귀족들의 반란으로 살해되고 중대 왕권은 무너지게 되었다. 이어 선덕왕 때부터 방계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마지막 경순왕 때까지를 하대라고 한다.

이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인 경향에 대한 진골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된 것이었기 때문에 하대의 신라사회는 귀족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었다. 그러면서 왕이라 하더라도 귀족 전부의 대표자일 수는 없었다. 그를 추대한 일파의 대표자에 불과했다. 그 결과 중앙귀족 간의 대립과 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하대 155년간에는 왕이 20명이나 교체가 되었고, 그 가운데는 상당수의 왕이 정권쟁탈전에 희생이 되었다. 중앙의 진골귀족들의 분열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지배체제의 구성원리가 되었던 골품제도는 의미가 없어져버렸고,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그리고 진성여왕 이후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독립적인 지방세력이 대두함으로써 마침내 중앙 진골귀족은 밀려나게 되었다.

중앙 진골귀족들이 전반적으로 몰락해 가고 있을 때 그 비판세력으로 등장한 인물들은 6두품 출신이었다. 진골 다음으로 귀족신분인 6두품은 관등, 관직 등에서 뚜렷한 차별과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17관등 가운데 제6위인 아찬까지 밖에는 오를 수가 없었다. 그에 따라 상대등이나 시중은 말할 것도 없고 각 부의 장관과 각 부대의 장군 등 고위 관직에는 임명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실제 행정사무를 맡거나 학문을 담당하는 지식인이 많았고, 진골에서 6두품으로 족강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6두품 세력은 진성여왕 때의 최치원과 같이 유교정치사상에 입각하여 진골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지배체제의 모순과 정치문란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거하는 경우도 있었고, 일부는 최승우나 최언위와 같이 신라를 떠나 후백제의 견훤이나 고려의 왕건에게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 말기에 중앙 진골귀족의 교체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지방 호족들이었다. 호족들은 대체적으로 지방에 토착해 살면서 대토지를 소유하여 키운 경제력을 바탕으로 하여 군사력과 권력까지도 지니고, 일정한 영역의 주민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는 독립적인 지방세력이었다.

진성여왕 이후 신라 골품제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자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지방반란 가운데 대표적인 세력이 궁예, 견훤, 왕건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먼저 견훤은 완산주를 근거지로 삼고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원한을 갚는다는 구호 아래 후백제를 건국했고, 궁예는 왕건세력과 연결하여 송악을 근거로 하여 고구려의 부흥을 구실 삼아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신라와 더불어 삼국정립의 형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왕실이 실제로 지배할 수있는 지역은 낙동강 이동, 소백산맥 이남의 원래 신라 지역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리하여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신라는 역사의 추진력을 이미 상실한 잔존세력에 불과하게 되었다.

궁예는 신라의 왕자 출신이면서도 왕실의 내분에 희생된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과 고구려 계통의 주민에 영합할 필요성 등에서 신라 타도를 내세워 세력을 확장하였고, 송악 지방의 왕건세력을 통합하여 후고구려를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설적인 면보다는 신라의 전통적 권위에 대한 타격에 급급했고, 호족세력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사회관계를 모색할 능력은 없었다. 또한 불교신앙에 심취하여 새로운 구세주로서의 미륵불을 자처하기로 했으나, 파행적인 행위로 인해 전통불교인 화엄종이나 신불교인 선종 등 전체 불교계의 반감을 산 것도 호족들의 지지와 민심의 수습에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더욱이 수취방법이 도적들의 약탈적인 방법을 지양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포악한 정치만을 일삼다가 결국 자신의 부하들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견훤은 원래 상주 지방의 농민 출신으로 추정되지만, 서남 지방의 군인으로 출세하여 전주 지역을 근거로 하여 옛 백제 지역 주민들의 반신라 감정에 호소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정치나 외교에서 기민한 수왕을 보여주었으나,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부족하여 새로운 사회관계에 대한 전망을 갖지 못함으로써 지방호족세력의 협력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은 보여 주지 못하였다. 그는 주로 지역감정에 호소하면서 무력의 과시만을 일삼다가 호족들의 지지를 상실하고 일반 민심과 유리되어 멸망하고 말았다.

궁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된 왕건은 궁예나 견훤과 달리 지방호족들과의 연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또한 일반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크게 힘쓴 결과, 마침내 후삼국통일의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왕건은 해상세력과 군진세력을 포용한 지방호족 출신으로서의 성격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지방호족들과의 연합과 민심 수습에 노력하여 후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밖으로는 궁예와 달리 신라에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후백제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대결하여 타도하려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은 왕건의 정책은 실효를 거두어 먼저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 평화리에 신라를 병합하는 데 성공하였고 왕실의 내분으로 분열된 후백제까지도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출처- 한국사특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