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민족의 성립을 위해서는 당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들의 참여, 민족으로서의 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농민층은 개항으로 인한 제국주의 침략의 직접적 피해자들이었다. 또 개항으로 촉발된 정부의 개혁정책은 농민들에게 가중된 수렴으로 귀결되어 그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이들이 민족으로서 성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모순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을 통해서였다.
개항 이후 불평등조약을 기초로 전개된 대외무역을 독점한 일본, 임오군란 이후 내정을 간섭하면서 앞서 가는 일본을 추격하는 청나라, 개혁 사업을 전개하는 정부의 강화된 수탈 아래 안으로 쌓여 가던 농민층의 불만은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전쟁으로 폭발하였다. 동학교도들은 1892년 이래 교조신원운동을 통하여 외세, 특히 일본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표출하였다. 이들은 1893년 보은에서 열린 교조신원을 위해 개최한 모임을 '민회, 의회'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894년의 갑오동학농민전쟁에서 이들이 내건 요구조건을 보면 이들은 자신들의 성장을 가로막은 삼정의 문란을 철폐하고, 특히 일본인들의 불법적인 미곡수출에 반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이러한 모순의 원인을 일제의 침략과 아울러 민씨 척족정권의 부패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고 흥선대원군의 등장을 기대하였다.
한편 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청병이 파견되고 일본이 이를 기화로 군대를 파견하여 전운이 짙어지자 동학 농민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맺어져 소강상태를 이루게 되었다. 조선에 세력을 부식코자 노리던 일본은 국왕을 무력화시키면서 친일정권을 수립하여 내정개혁을 구실로 그들의 침략에 유리하도록 국정 전반을 바꾸어 놓으려고 하였다. 또 정부나 지배층의 입장에서도 농민전쟁에서 분출된 농민층의 개혁요구를 어느 정도 수렴하는 조치가 필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민씨 척족세력을 제거한 가운데 이루어진 개혁조치가 갑오개혁이었다. 이것은 '근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민족주의 발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제도의 이식으로서 그 침략을 조장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약점을 갖는다. 일제는 이 단계에서 이미 조선을 보호국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 처하여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을 기치로 이차 봉기를 일으켰는데, 이 단계에 이르러 농민군의 민족주의적 성격은 한층 두드려진다. 이들은 봉기에 앞서 강적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양반 유생층과 연대를 도모하였으나 동학 농민군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한 양반층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후 동학군은 일본군, 관군, 양반 유생들에 의해 결성된 '의병'에 의해 진압되었는데 이때 이들은 격문을 발표하여 조선왕조 주민들의 반일로의 연대를 도모하였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적국이던 일본이 개항 이후 침략을 자행하여 결국 개화당과 결탁하여 군부를 핍박하고 있다는 것, 이에 동학당이 "의병을 들어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며 조정을 청평하고 사진을 안보"하려고 했다는 것, 그러나 뜻하지 않게 관군이나 군교와 살상을 하게 되니, 이는 골육상전이라는 것을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생각건대 조선 사람끼리라도 도는 다르나 척왜척화는 그 의가 일반이라 각자 돌려보고 충군우국지심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같이 척왜척화하여 조선으로 왜국이 되지 아니하게 하고 동심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할지라"라고 하여 대중을 민족으로 결집하여 항일전선에 함께 나설 것을 기도하였다. 갑오동학농민전쟁은 농민층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미신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근대사회에 대한 전망의 모호성 동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이 개항 이후 일본의 침투와 정부의 수탈, 강화속에서 민족의식, 반봉건의식을 키워 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갑오동학농민전쟁은 조선 후기 이래로 성장하던 농민운동의 초고봉으로서, 그 실패는 가장 강력한 항일세력이 소멸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농민들이 일본과 투쟁 과정에서 민족으로서 자각하게 된 것은 이후 한국 민족주의 발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편 청나라를 물리치고 조선을 보호국화하려던 일제의 의도는 이른바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 세력의 진출과 일제의 야만적인 왕비 살해사건으로 촉발된 조선인들의 저항으로 좌절되었다. 일본과 러시아는 조약을 맺어 양국세력이 동시에 퇴조하여 결국 한반도에는 힘의 공백상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사대관계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은 물론 만국공법상의 당당한 하나의 국가로 인정받고자 세운 것이 바로 대한제국이었다. 고종은 황제로 등극하고 광무를 새 연호로 정하였다. 이어서 한국역사상 최초의 헌법이라고 할 '대한국 국제'를 1899년 제정, 선포하였다. 이것은 세계만국에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천명하고, 황제가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는 '500년 전래 만세불변'의 전제정치임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고종은 자신과 황실 아래 모든 권한과 재원을 집중하고 황실이 주도권을 잡고 개혁 사업을 전개하였다. 개혁을 위한 재원 확보를 위해 양전 사업을 일으키고, 학교를 세우고, 사업을 장려하였다. 또한 국기를 제정하는 등 국가적 상징을 만들어 국민적 통합에도 노력하였다. 다른 한편 이권의 외국 양여 금지,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하는 등 반외세적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또 이범윤을 간도에 파견하여 교민을 조사하고 영토를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출처 - 한국사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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