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0 근대적 토지소유의 성립 과정 근대적 토지소유는 개항 전후로부터 시작하여 해방 후의 농지개혁에 이르기까지 긴 사회변동 과정과 병행하여 성립하였다. 지주적 입장에서 시행된 갑오개혁과 광무양전지계사업, 일제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한 식민지지주제의 성립, 해방 후 농지개혁의 실시와 농민적 토지소유의 성립이 그 내용을 이룬다. 19세기 농민운동은 조세 수취체계의 문란에 대한 불만으로 촉발되었다. 농민운동의 최고봉인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도 삼정의 문란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농민전쟁에서는 농민들이 '토지의 평균분작'까지 요구하는 단계에 도달함으로써 지주적 토지소유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개화파의 조선군과 함께 농민전쟁을 진압하면서,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까지 내다본 농민들의 토지개혁 요구는 .. 2023. 4. 11. 조선사회의 신분과 계층 흔히 조선 사회를 양반사회라고 한다. 중앙집권적 관료제 사회에서 지배층이었던 관인 양반을 중심으로 사회가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특히 관직을 가지고 있는 관인층을 의미했으나 신분적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양반 신분이란 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신분법제도 기본적으로는 양천제였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양인 확보책과 관련하여 양천신분제가 적극 추진되었고, 고려시대에 비해 더 철저하게 준수할 것이 요구되었다. 조선시대의 모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 상의 천인은 오직 노비만을 지칭하였다. "대저 천인의 소계는 모역을 따른다. 다만 .. 2023. 4. 9. 고려사회의 신분과 계층 신분 법제로서 양천제가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중세 왕조교체기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이미 삼국 전쟁 말기에 포로로 잡힌 노비들을 양인으로 방량하여 자유인으로 만든 사례를 보았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뒤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양천제를 위해 특별한 법제적 조치를 강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왕조에 들어오면 더 확대된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통일국가의 기반으로서 양인 확보 차원에서 노비변정 사업을 시행하면서 귀족들의 노비소유에 제한을 가하고자 하였다. 성종 원년에 최승로가 올린 상소문 가운데 "본조의 양천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라고 한 것은 그 같은 배경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의 양천제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조선시대에 비해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 2023. 4. 6. 고대사회의 신분과 계층 고대의 신분 법제는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지배층들은 현실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여 주변 지역의 여러 세력을 흡수, 통합하거나 정복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조 설화를 내세우거나 탄강설화 등 혈통을 강조하는가 하면, 고급 신앙으로서 불교에 의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당 사회의 지배체제 정비 과정에서 관료제를 받아들여, 이 틀 안에 지배 세력들을 위계적으로 배치해나갔다. 그리고 연맹의 형태로 포섭되는 층들을 우대하는 한편, 반대로 저항하다가 포로로 잡히거나 집단적으로 정복된 주민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자는 지배 신분층으로, 후자는 노비 등 천민으로 자리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 2023. 3. 13. 이전 1 2 3 4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