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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려 무신집권체제의 성립과 몽골과의 전쟁

by 우기부기87 2023. 1. 30.

1196년 이의민을 제거하고 집권한 최충헌, 최충수 형제간의 권력다툼에서 다음 해에 최충헌이 승리한 이후에 최 씨 무인정권은 안정되었고 제도적 틀을 갖추어 갔다. 역대 무인정권은 군주를 형식적인 상징적 존재로 만들어 그 실권을 박탈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에 따라 군주를 교체하기도 하였으나, 군주의 전통적 계승권과 주권자로서의 상징성은 유지시켰다. 또한 전통적 정부기구도 유지시킨 상태에서 무인정권의 체제가 구축되었다. 의종시대 이후 복구된 황제국제도 역시 봉작 등에 의해 최씨집정의 권위를 확보하는 데 활용되기도 하며 존속되었다.

최충헌은 1206년에 후로 책봉되어 휘하에 독자적인 부를 세우는 존재가 되었다. 뒤에 최우와 김준도 후로 책봉된 바가 있다. 최충헌은 호위무사들로 도방을 조직하여 교대로 숙위하게 하였다. 1209년에는 군국의 정사를 관장하는 특별기구인 교정도감을 설치하여 자신이 그 수장인 교정별감이 되었다. 이후에는 무인집정들이 교정별감이 되었다.

최씨정권의 권력장악이 확고해지면서 국정을 결정하는 공간이 궁성과 정부의 공식적 관부에서 최씨무인집정의 사저로 바뀌었다. 최충헌은 정권장악이 확고해진 1202년부터는 사저에서 무무관의 인사를 결정하였다. 최우집권기에는 인사담당기구인 정방과 문사들이 교대로 24시간 호위하며 보좌하는 기구인 서방이 사저에 설치되었고, 무사들의 호위 인력을 대폭 늘려 도방도 확대되었다.

기존 정부기구들이 그대로 있었지만 인사권을 장악한 최씨집정을 추종하는 당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정부기구들은 최씨집정이 사저에서 결정한 것을 받아 그대로 집행할 뿐이었다. 최충헌에게는 사적으로 쌍무적 주종관계를 맺은 문객이 3000명에 이를 정도로 추종자가 많았고, 최우시대에도 이러한 추종자가 많아, 24시간 교대로 호위하는 수많은 문무의 유능한 자들로 서방을 설치하고 도방을 확대할 수 있었다. 최씨집정이 지명한 아들이 권력을 물려받는 취약한 시기에 이 문객들은 그 후계자에 승계되어 충성을 바치며 호위하는 일차 세력이 되었다. 또한 그 세력을 토대로 정부조직을 장악하는 공식적인 권력세습 과정이 진행되었다. 최씨집정의 권력은 전통적 정부조직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대권을 대행하는 체제화된 권력이었다. 인종시대 이후 문벌세력의 발호를 거쳐 무신란 초기의 정치적 혼란이 끝나고 최씨집정의 강력한 독재권력이 성립된 것이었다. 전국에 걸쳐 일어나던 민란들도 최충헌 집권기를 거쳐 거의 가라앉았다. 문신들의 기용이 늘어나고 무신들의 정부 요직 임명비중은 최우시대 이후 현저히 줄어들었다. 과거시험이 활성화되어 고려시대 전체를 통해서도 시행 빈도와 선발인원수에서 높은 수준이었다. 최우는 유명무실해진 중앙군을 대신하여 삼별초를 조직하고 마치 사병처럼 보일 정도로 병권도 완전히 장악하였다.

최씨정권이 사실상 체제화되었어도 사상적으로 정당성이 밑받침되고 사회적으로 신망을 받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한계 속에서 최씨집정의 시기에는 정신문화의 폭은 제약되었으나, 새로운 문화운동이 일어나고 실용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유교의 경우에는 정치사상으로서의 성격은 억압하고, 시와 문장을 중심으로 한 기능적인 면을 중요시하였고, 불교의 경우에는 문벌 및 왕실과 연결되어 적대적이었던 교종교단들을 탄압하여 퇴조시켰고, 지방에서 새로이 일어난 선종 계열의 수선사등 새로운 결사들을 포섭, 지원하였다.

그 결과 12세기 초 이래 성리학 연구의 흐름은 끊겼고, 대신 문장과 시에서는 이규보 등 뛰어난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기술문화에서는 <향약구급방>이 편찬되어 자국에서 생상되는 약제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의술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여 의료혜택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인쇄기술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한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인쇄가 발명되어 발달하기도 하였다. 

무신집권기의 사회는 앞 시기 이래의 모순이 더욱 확대되고 있었으나, 그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되지 못하였다. 12세기 이래로 진행된 권세가들의 토지겸병에 따른 농장의 발달이 확대되었고, 전시과제도는 유명무실해졌다. 하급지방관부터 최고 권력층까지 수탈은 자행되었다. 하층민의 수탈에 대한 항거와 지배질서로부터의 이탈이 이어졌다.

특히 노비나 천민층의 봉기는 신분질서에 저항하는 성격을 띠었다. 

무인집권체제는 1231년 이후 30여 년간에 걸친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는 전쟁에 힘을 쏟다 무너졌다. 몽골은 고려에 파견된 사신이 귀굴길에 국경지대에서 피살된 것을 빌미로 침입하였다. 몽골은 오만한 내정간섭을 하고 지나치게 과다한 물품을 요구하였다. 또한 다른 정복지들에 적용하는 사항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타협이 아닌 전쟁이 불가피한 것으로 판단하였고, 최씨정권은 1232년 해상운송과 방어에 유리한 강화로 수도를 옮겨 몽골과의 장기전 체제로 전환하였다. 최씨정권은 지방의 항몽전을 독려하며 이끌어 나갔으나, 대규모 방어군을 편성하여 몽골군과 정면 대결한 것은 몽골의 일차 침공 때만 있었다. 고려의 중앙군이 초기에 대패한 이후 유라시아 대륙의 초강대세력 몽골의 거듭된 침공을 장기간 끝까지 막아 낸 것은 지방공동체들의 집적된 힘이었다. 각 지방공동체 단위의 성을 거점으로 지방민들이 자신들의 가족과 생업 터전을 지키려고 결사 항전함으로써 몽골의 침입으로부터 30여 년을 지킬 수 있었다. 

몽골과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무인정권은 재정이 약화되었고, 지방사회의 전쟁피해가 극심하여 최씨집정의 정치적 통솔력도 점차 약화되었다. 최우의 아들 최항은 집권 8년 만에 병사했고, 그 뒤를 이은 최의는 다음 해에 그 수하 김준에게 제거됨으로써 최씨정권은 막을 내렸다. 

30여 년의 항전 끝에 고려는 몽골로부터 크게 완화된 강화교섭 조건을 제시받았다. 고종 46년에 파견된 태자는 몽골의 헌종이 죽은 직후 그 아우 쿠빌라이를 만났다. 제위를 놓고 형제간에 무력대결 상태에 들어간 쿠빌라이는 완강한 항전을 벌여 온 고려가 자신에게 화의를 요청해 온 것에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부여하였고, 고려에 대해 전과 다른 특별한 호의를 보였다. 고려 측에서 제시한 고려왕국의 존속 보장과 몽골군의 즉각 철수등, 6조 항의 요구를 모두 수락하였다.

 

 

출처 - 한국사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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