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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려사회의 신분과 계층

by 우기부기87 2023. 4. 6.

신분 법제로서 양천제가 크게 주목받게 된 것은 중세 왕조교체기에 들어서의 일이었다. 이미 삼국 전쟁 말기에 포로로 잡힌 노비들을 양인으로 방량하여 자유인으로 만든 사례를 보았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뒤에도 국가적 차원에서 양천제를 위해 특별한 법제적 조치를 강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왕조에 들어오면 더 확대된 영역을 지배하기 위해서도 그렇고, 통일국가의 기반으로서 양인 확보 차원에서 노비변정 사업을 시행하면서 귀족들의 노비소유에 제한을 가하고자 하였다. 성종 원년에 최승로가 올린 상소문 가운데 "본조의 양천법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라고 한 것은 그 같은 배경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렇지만 고려시대의 양천제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조선시대에 비해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노비의 숫자가 10% 미만으로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양인 내부의 신분적 제일성도 조선시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천인의 경우 역시 노비 외에 향·소·부곡·역·관·진 등의 주민과 같이 신분적 차별을 받는 집단 천인을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이는 지역과 신분을 연결시켜 운영하던 지역적 계서제의 전통이 더 강했던 당시의 사회 실정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즉 고려 신분제의 경우 기본적으로 양천제라고는 하지만 양인 내부에서도 각종 계한이 심할 뿐 아니라, 천인 안에도 계한이 두어졌던 여러 신분층이 존재했던 것이다. 

고려 신분제에 관해서는 그동안 학계에서 전체 인민을 양인과 천인으로 나누어 과악하려는 양천제설과 귀족 · 중간계층 · 평민 · 천인을 각각의 신분층으로 파악하는 4신분제설로 크게 나뉘어 논쟁이 진행되어 왔다. 이 가운데 4신분제는 고려시대에 실재했던 신분적 차이를 설명하는 데는 강점이 있으나 중간계층이란 용어 사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신분층을 설명하면서도 신분과 계층이란 개념이 다른 용어를 혼용하는 등 이론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그리고 양천제설은 양인 · 천인 각 신분층 사이는 물론 동일 신분층 내에서도 신분적 비균질성이 크며, 수다한 신분적 차별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세심한 설명이 필요한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 신분 법제는 기본적으로 양천제에 입각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뒷시기 조선에서와 같이 양천신분제가 전일적으로 시행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고려의 성립 과정이나 지배층의 구성요소, 관료제 운영, 지방민의 존재 형태 등에 제약되어 고려시대 신분제는 양천제적 운영방식보다는 기존의 친족집단이나 지방 세력의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이에 기초하여 신분제적 질서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계급내혼적인 요소도 강했다.

우선 신분 법제상으로 고려시대 주민은 양인 신분과 천인 신분으로 크게 대별되었다. 그런데 양인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신분차별이 있었다. 우선 주민을 사 · 서로 나누어 피지배층을 집권층과 구분하였다. 사는 관료제 운영의 중심 세력으로서 군역부담, 관료선발과 승진, 형률 적용 등에서 특권을 누렸고, 일반 생활면에서도 일반 서인에 비해 월등한 지위를 누렸다. 과거제가 실시되었다고는 하나 음서제가 폭넓게 적용되어 문벌귀족 신분층의 신분세습을 보장하였다. 또한 군반씨족인 군호가 지는 군역과 일반 민호가 지는 군역이 이원적으로 구분되어 둘 사이에는 계층적 위상이 달랐다.

그리고 일반민 가운데도 공장이나 상인은 최고 교육기관이라고 할 국학에 입학할 수가 없었고, 벼슬에 나아가더라도 관직 진출에 제한을 받았다. 예컨대 악공의 경우 그 아들 가운데 1명은 업을 계승케 하고, 나머지는 한품서용의 조건으로 7품직 이하에 기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문직에서의 일탈을 방지하고 관료제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장과 상인의 가는 기술을 가지고 임금을 섬겨서 그 직업에 전념하고, 입사하여 사와 함께할 수 없다"는 관련 규정을 본다면 양인 내부에서도 명백한 신분적 차별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양인 내부에서도 왕조국가 안에서 왕을 섬기는 데 문 무직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이 한 편에 있고, 그 밖에 기술을 가지고 섬기는 사람, 농업생산을 통해 섬기는 사람 등이 신분적으로 구별되었던 것이다. 물론 천인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관직에 나아갈 수 없는 특수한 신분층으로 간주되었다.

양인 신분이 균질적이지 않고 그 내에 다양한 신분적 차별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천인 신분 역시 다양한 신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특히 고려적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은 향 · 소 · 부곡 등 특수지역민이 노비와 거의 마찬가지인 천인으로 취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는 약 900여 개의 향 · 부곡 · 장 · 처 등 특수지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일부 지역은 1,000정 이상의 규모로 존재하였다. 이 지역 거주민들은 재산과 같이 취급되었던 노비와는 다른 존재로서 '잡척'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들 주민은 일반 군현민과 신분적으로 차별을 받고 있었다. 국학으로의 입학이나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고, 승려가 되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형벌상에서 노비와 같이 취급받았고 일반 군현으로의 이주는 물론 타 구역으로의 이주도 제한을 받았다.

한편 천인 가운데 가장 천대를 받고 제일 열악한 처지에 있었던 것이 노비신분층이다. 노비는 천인의 대표적 존재로서 소속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주거 형태에 따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 등으로 나뉘었는데, 이 점은 조선시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고려시대의 노비는 고려사 형법지 노비조의 "8대 호적에 천류와 관계된 자가 없어야 관직에 나갈 수 있다. 천류가 된 자는 부모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천인이 있으면 천인으로 삼는다"는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일천즉천'이라는 강한 신분법적 규정에 제한을 받고 있었다.

이들 천인은 주인에 대해 거의 절대적으로 예속되어 주인의 매질에도 항거하기 어려웠으며, 도망이나 주인에 대한 배반과 모욕 · 반항 · 모함 등은 엄벌에 처해졌다. 그리고 반역이나 그에 준하는 죄가 아니면 주인을 고발하는 것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솔거노비와는 달리 외거노비는 실제 자기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으며, 자기 주인 외에 타인의 땅을 빌려 경작하는 경우도 다수 있어서 농노와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은 물론 주인의 경우도 노비에게 비록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노비를 살해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함부로 살해하는 경우 처벌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아는 노예와는 구분되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노비 역시 사법 제도상 행위의 한 주체로서 노비의 사회적 행위의 책임은 일반적으로 노비 자신이 지게 되어 있었고, 주인은 그 책임을 지지 않았다. 노비의 방량 및 면역에서는 공노비의 경우는 60세에 역을 면제시켰고, 사노비는 국가의 허가를 받아 방량할 수 있는 법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출처-한국사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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