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의 도평의사사는 문하부와 중추원의 재신들의 합의체로서 수십 명의 재신이 이에 소속하여 중앙의 6조와 제사뿐만 아니라 지방의 각 도를 거느렸다. 이 체제는 새 왕조의 태조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어 왕권을 크게 제약하였다. 이방원이 왕이 된 후 문하부를 없애고 문하부의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키고 의정부가 도평의사사의 의정기능을 전담하게 하였다. 중추원도 승추부와 대언사로 분리하여 군사와 왕명 출납을 각각 나누어 맡게 되었다. 고려 귀족정치의 두 중심기관을 해체하여 합좌기관으로서의 도평의사사의 근거를 없애 의정부, 사간원, 승정원 등의 조선왕조 고유의 왕정 보필의 중심기관들이 탄생하였다.
의정부와 6조를 정비하여 여러 집행관사인 시와 감을 직무의 성격에 따라 6조 중 어느 하나에 소속시키는 속아문제도를 마련하고, 6조를 정 2품 아문으로 승격시켜 정무의 중심 집행기관으로 삼았다. 의정부의 당상관의 수를 절반정도로 줄이고 6조로 하여 서무를 분장하여 왕에게 직접 업무를 보고하도록 하여 왕 중심의 6조체계를 완성시켜 의정부-6조-각 사의 체제가 잡혔다. 세종 18년에 의정부 서사제가 복구되어 그간의 6조 직계체제를 뒤엎는 것처럼 보였으나 내용적으로는 각 조에서 가부를 의정하여 의정부에 올려 의정대신들의 동의 여부의 기회를 가지도록 하는 조정 조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문종 때에는 일상적인 업무는 6조가 의정부에 보고하지 않고 왕에게 바로 아뢰도록 하여 6조 직계체제가 거의 다시 회복되는 추세였다. 세조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면서 6조 중심의 체제를 재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정제도 전체 차원에서 통일성을 기하고 인사관리상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고려시대의 지방 통치는 향리들에게 거의 다 맡겨지다시피 하였다. 중앙정부는 시찰관으로서 안찰사를 5도에 파견하여 반년 임기로 순행하는 제도로서 향리들의 통치를 감독하였다. 후기로 내려오면서 도의 행정적 기능이 강화되고 지방사회의 분화 발전에 따라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가 필요해졌다. 안찰사는 1389년에 도관찰출척사로 바뀌었다가 질품을 재상급으로 올려 전임의 관찰사제가 정착하였다. 조선시대의 도의 관찰사제도가 여기서 시작되었고 이로써 중앙집권화가 일보 전진하여 지방행정체제의 관료화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절대적 다수를 차지하는 각 지방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이제 지방 호족의 군백성이 아니라 왕의 백성으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인력으로 동원될 수 있는 체제가 잡혔다. 태종 9년에 8도의 윤곽이 잡히고, 태종 13년에 지방제도의 개혁이 대대적으로 단행되어 대소 군현의 병합을 비롯하여 여러 조정 조치가 이루어져 8도제가 이루어졌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개창한 후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고 하였고, 의장과 법제는 모두 고려의 고사를 따른다고 선언하였다.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는 것은 태조 2년 2월의 일이었다. 정도전이 1394년에 찬진한 조선경국전에서 국정의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다. 주역의 인정론에 근거해 새 왕조의 왕위는 만물을 생성시키는 천지의 덕을 본받아 인정을 행해 천하 사방의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성인의 정치를 행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유교정치를 표방하여 문물과 제도를 유교식으로 갖추기 위해서는 고제와 고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였다. 태종 초기에 예조, 이조, 병조, 의정부 승정원 등에서 고제 연구를 수행하다가 10년에 의례상정소라는 전담기구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세종 2년에 집현전을 설치한 것을 계기로 성과가 나왔다.
집현전의 실제 활동으로는 고제의 연구와 편찬사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고, 명나라와의 사대 외교에서 각종 외교문서를 작성하고 사행을 직접 수행하거나 명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집현전은 영집현전사, 대제학, 부제학 10명을 포함하여 총 20명으로 구성되어 단일 관부로는 최대 규모였다. 전임관인 부제학은 과거의 시험관, 사관, 지제교 등의 일을 겸했고, 나중에는 언관의 기능도 가졌다. 이들이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경연과 서연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국왕의 정사는 거의 경연자리에서 논의되다시피 하였고, 고제 연구는 예조와 의례상정소가 의례와 제도의 큰 테두리를 세우고 집현전이 시행에 필요한 세부적, 기술적 문제를 풀어내는 형태로 진행하였다.
유교적 국가와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모든 문물과 제도를 유교의 규식에 따라 바꾸어야 했다. 고려시대에는 고대 이래의 토속적인 것이 불교, 도교에 의해 윤색되거나 순수한 불교, 도교의 의례가 많이 행해졌다. 새 왕조는 모든 것을 유교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유교가 이상으로 삼는 삼대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제도, 고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세종 때 집현전을 통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세종실록의 부록으로 [오례, 악보, 지리지, 칠정산] 등을 내는 성과를 거두었고, 세조부터 성종 때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등을 공표하기 이르렀다.
세종은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의 서문에 나타나듯이 이는 유교적 편민의식의 발로였다. 백성이 군백성에서 왕의 백성으로 재탄생할 때 군주는 유교의 민본의식을 새로운 이념으로 취하여 왕정의 기틀로 삼고자 하였다. 훈민정음은 언어학적으로도 음운이론에 부합하는 과학적인 음소문자의 표기 방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아시아 일대의 음소문자들에 대한 섭렵을 통하여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로서 15세기 조선의 학문의 국제성을 보여 주는 예로서도 주목된다.
출처 - 한국사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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