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사상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개화파는 동도서기정책의 실무자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하급 실무자로의 한계와 청나라의 과도한 내정간섭으로 인하여 개혁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직접 개혁정치를 실행하고자 하였다. 청불전쟁으로 인하여 조선 주둔 청나라군의 일부가 철수하고 일본이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자 1884년 10월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을 점령하고 정권을 잡았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서 모두 실패한 개화파는 1896년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하였다. 독립협회는 통상의 확대가 한국의 독립에 유리하다고 하여 개항장 증가를 주장하였고 불평등조약은 국력이 약한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치외법권의 인정을 주장하여 자유무역주의의 입장을 치하고 있었다. 광산은 국부의 원천이고 그 개발을 통하여 고용증대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므로 자본과 기계를 도입하여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철도와 도로의 건설은 상공업 발전과 열강의 자본 투자를 유도할 수 있으며 고용기회를 확대하고 수송을 편리하게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독립시켜 준 것을 기념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독립협회는 미국, 영국, 일본의 자본 침투에 대해서는 개발, 고용창출, 문명화 등으로 인식하였고 러시아의 자본 침투에 대해서는 침략이라고 보아 반대하였다. 전,현직 관료와 일반 대중의 참여로 정치적 기반을 어느 정도 확보하였지만 정부의 강력한 진압으로 해산당하였다.
대흥군과 여흥민씨가 집권하는 동안 사회모순을 극복하려는 근본적인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후기 이래의 사회모순은 더욱더 심화되어 갔다. 또한 개항으로 인한 통상교역의 확대는 농촌사회의 양극분해를 더욱 촉진하였다. 개항 이후 곡물의 일본 수출로 곡물가격이 상승하면서 지주들은 큰 이익을 얻게 되었고, 토지소유를 늘려갔다. 농지면적 증가를 목표로 한 농지개발 사업과 조운제도의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도입한 전운사업은 농촌사회를 안정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수령과 이서층의 부정부패 역시 여전하였다. 농민층은 고리대의 피해까지 겹쳐 영세빈농층으로 몰락하였고 농촌에서 쫓겨나 도시로 모여들거나 유랑민, 화적이 되었다. 곡물가격 상승으로 인한 물가 상승은 농민층과 도시 빈민층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농민항쟁이 군현 단위에서 다시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1880년대 말부터는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여 1893년 한 해에만 65건의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자 하는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군 단위를 뛰어넘어 여러 지역의 농민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고, 동학의 평등사상과 반침략사상이 농민층의 개혁실천 의지와 결합하면서 군현 단위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농민항쟁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으로 귀결되었다.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은 1~2월의 고부 농민봉기 단계, 3~4월의 호남창의소 단계, 5월 초의 전주화약, 7~8월의 집강소 단계, 9월 이후의 제2차 봉기 단계를 거쳤다. 집강소 단계까지 농민군은 나주와 순천을 제외하고 전라도 50개의 읍을 장악하였고 제2차 봉기 단계에서는 충청도 공주, 청주까지 진격하여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농민군은 공주와 청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연고지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관군, 일본군, 양반 유림층의 갑오의려가 연합하여 후퇴 농민군에 대해 토벌작전을 전개하였고 농민군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궤멸하였다.
농민군의 요구는 민씨 척족세력의 축출과 대원군의 복귀, 노비제도의 폐지와 천민층의 신분해방, 영세소상인층의 상업활동 보장과 조세제도의 개혁 등으로 볼 수 있다. 잡세 혁파 요구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소상공인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토지소유문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지향이 있었을 것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농민군의 이러한 요구는 조선 후기의 사회모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반봉건, 반침략의 입장에서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보수연합세력에 의해 농민군이 패배하고, 농민군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갑오개혁마저도 양반 유림층의 의병에 의해 실패로 끝나면서 그때까지 쌓였던 사회모순의 극복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광무개혁에 이르면서도 모순은 극복되지 않았고 일본의 침략이 더해지면서 오히려 모순은 더욱 심화되었다. 쌀의 만성적인 해외유출로 인한 민중 경제생활의 악화도 여전하였고, 외국산 면제품의 유입으로 인한 전통 토포산업의 붕괴는 1894년 이후 본격화되었으며, 그로 인해 조선은 일본 면제품 원료의 공급기지가 되었다. 또한 국가재정으로 편입되었던 역둔토와 왕실의 재정기반이 궁내부관리로 환원되면서 역둔토, 궁장토의 소유권과 도조, 결세를 둘러싼 작인과의 대립, 잡세 수취에서의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광산 개발을 위한 광구 설정으로 토지를 침탈당하거나 경작을 중지당한 농민들도 생겨났고, 철도 건설 현장에서는 노동력을 강제 징발당하고 농사철을 놓친 농민들도 생겨났다. 곳곳에서 천주교와 기독교가 전통적인 가치와 충돌하면서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특히 농민전쟁의 중심지였던 전라북도 8군 지역에서는 농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균전수도문제가 여전히 경작 농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1904년부터는 일제의 토지 약탈이 본격화되어 토지로부터 유리되는 농민이 늘어났고, 1903년에는 징세기구의 개편으로 인하여 이서층이 대규모로 실직하였으며, 1907년에는 군대해산으로 인해 군인층이 실직하였다.
1895년부터 1907년까지 전국적으로 120여 회 이상 농민항쟁이 일어났고 수십 명 규모의 농민무장대가 곳곳에서 활동하였으며 특히 화적이 활빈당 조직으로 발전하여 이권 양여 반대, 외국상인의 상업활동 금지, 방곡령 실시 등을 주장하면서 활동하였다. 광산 노동자, 부두 노동자의 저항도 여러 차례 일어났고 실직에 따른 생계형 저항도 일어났다.
이런 움직임들은 1907~1908년 평민의병으로 발전하였다. 이 평민의병은 이전의 양반 유림 의병과는 달리 농민, 소상인, 군인, 노동자, 이서층, 활빈당 등 각계각층의 평민이 참여하고 주도하였으며 지역주민의 지원을 받는 소규모 부대가 지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평민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였지만 1908~1909년에는 호남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출처 - 한국사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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