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3.1 민족해방운동

by 우기부기87 2023. 2. 7.

일제의 야만적인 통치에 대한 전 민족적 분노는 1919년 3월 1일 폭발하였다. 가장 큰 원인은 일제의 무단통치였다. 일제가 '문명화'를 내세우며 이식한 제도들이 그 나름의 합리적인 면도 있었겠지만 전통을 무시하고 급격하게 일방적으로 강요할 때 반발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제도가 민족차별적이며,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층의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일 때 반발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전후해서 세계는 '폭력의 시대는 가고 자유평등의 세계 개조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1917년의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1918년 독일의 혁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국내에 알려져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도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중국 상해에서도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였고, 동경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을 하였다. 이광수, 최용팔 등 동경 유학생들은 1919년 2월 8일 동경 YMCA 건물에 모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기만성과 폭력성을 지적하고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운동을 준비한 것은 '민족대표 33인'으로 불리는 사회적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학생층과 연결하여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하고 이를 널리 배포하여 운동을 확산시킬 계획을 꾸몄다. 1월 고종의 사망이 독살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져 인심이 흉흉하던 차였다. 그 장례일이 3월 3일로 잡혀서 서울은 물론 지방의 많은 국민이 상경할 것이 확실하므로 이를 이용하여 대대적 시위를 일으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군중이 운집한 파고다 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는 대신, 태화관이란 음식점에서 일본경찰에 연락하여 자수하고 말았다.

이러한 지도층의 투항적 자세와는 관계없이 만세시위운동은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숨어 있었던 태극기가 등장하였고, '대한독립만세'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학생들은 이 독립선언서를 지방의 각 도시로 전파하고, 그곳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지방 도시에서의 시위는 다시 주변의 지방으로 전파되어 4월 초순에는 투쟁의 파고가 최고조에 달하였다.

일단 점화되자 농민, 노동자, 상인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고, 나중에는 이들 중에서 지도자가 나오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강압적 농정의 가장 큰 피해자들로서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하였다. 노동자들도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주로 개별 일본인이나 관영 업체에서 민족차별과 차별적 임금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노동자층은 시위가 잦아들던 3월 22일 서울에서 노동자대회를 열어 운동의 열기를 다시 높이고, 서울 주변의 농촌 지역으로 운동이 확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상인들은 철시함으로써 운동에 호응하였다. 지방의 유지층인 구래의 양반층이 시위를 주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헌병본부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반감을 가장 많이 부른 것은 민족적 차별 및 모욕이었다. 농민층의 불만으로서 가장 자주 거론된 것은 상묘의 강제배부 및 과도한 부역이었다. 또 태형과 공동묘지제도의 강제가 폭넓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지도부가 제시한 비폭력, 무저항의 원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폭력투쟁은 대개의 경우 일본경찰의 야만적 탄압으로 인해 촉발되었지만 처음부터 폭력적인 경우도 있었다. 농민들은 몽둥이, 낫, 돌 등으로 무장하고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면장, 면서기 등을 징계하고, 징세대장 등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경찰의 파출소 등도 자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잔인하였다. 피해자에 대한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최고 사망 7,500명, 부상 1만 5,000명이었다. 4만 6,000여 명이 수감되었는데, 이들은 모진 고문을 감내해야 했다. 이 밖에 약 49개 처의 학교와 교회, 715호의 민가가 불탔다. 이 중에서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은 선교사들에 의해 해외에까지 알려져 일제의 만행이 천하에 폭로되었다.

3.1운동의 가장 큰 의의 중의 하나는 이를 통한 민족적 각성이다. 농민, 농민자층은 투쟁 과정을 통해 민족으로서 각성, 결집했고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을 이루게 되었다. 수많은 젊은이가 민족의식을 깨우쳐 이후 민족해방운동에 투신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3.1운동은 수많은 운동가, 지식인들에게 민중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1920년대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도입, 농민 노동자 운동이 활성화되는 데는 이러한 인식이 깔려 있었다. 또한 이 운동으로 면장 면서기들이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사직서를 내는 바람에 행정체계는 상당 기간 마비되었다. 

3.1운동으로 폭발된 독립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민족의 열망은 상해 임시정부수립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또한 국망을 전후해서 해외로 망명한 운동가들의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였다. 해외 운동의 최대 근거지는 중국 만주 지역, 러시아, 미국이었다. 한국인 다수가 거주하고 있었던 중국, 러시아는 독립운동에 비교적 우호적이었지만 그곳도 국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혼란 속에 있었고, 또 일본의 침략 위협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 국가들 모두에게 자신의 국익이 최우선과제일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자신들의 사정에 따라 한국의 독립운동을 대했다. 해외의 민족해방운동세력들은 온갖 곤란과 냉대 속에서 활동해야 했던 것이다. 

이들 운동세력의 인적, 물적 기반이 된 교민사회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1919년경 중국 만주에는 약 100만 명, 소련령 연해주에는 약 50만 명의 교민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외에 나라가 망하면서 의병운동,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던 인사들이 일본군에 쫓겨, 혹은 새로운 투쟁을 위해 들어와 기반을 닦았다. 이 지역 외에도 중국 관내인 북경, 상해 지역에도 약간의 독립운동세력들이 있었다.

 

 

 

 

 

                                        출처 - 한국사특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