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전근대사회의 신분과 계층

by 우기부기87 2023. 3. 11.

역사에서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는 큰 지표 중의 하나는 신분제의 존재 여부이다. '신분에서 계약으로'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이 신분제는 서구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시민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면서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함을 천명할 수 있게 되었고, 혈통에 따라 사회적 지위가 세습되도록 규정한 신분 법제는 몇몇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용납될 수 없게 되었다. 불평등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시민사회의 성장에 힘입어 신분제라고 하는 법제적, 형식적 불평등 체계를 종식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근대사회가 달성한 큰 성과 중의 하나이다.

인류 역사에서 불평등구조는 뿌리 깊은 것이고, 그 가운데 신분제는 인간의 사회적 진출을 태생적으로 제한하는 법제로서 커다란 사회적 진전이 없이는 그것을 타파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신분제가 사라지는 데는 근대 형성기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중요한 사실은 전근대사회라고 하더라도 신분제의 구조가 시기나 지역에 따라 동질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회구성의 발전사 설명에서 흔히 고대 노예제, 주에 농노제 등을 들지만, 이러한 설명 틀만으로는 전근대사회 신분제의 발전에 대해 충분한 해명을 하기 어렵다. 예컨대 고대 로마의 만민법과 노예제는 신분 법제의 범주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동양의 경우 국가 형성기 이래 노비가 다수 존재했다고 해서 동양의 신분 법제를 노비제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동양의 노비와 서구 노예의 존재 형태가 같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골품제는 지배계급에 속하는 성골, 진골 귀족 및 관직 체계에 포섭될 6두품, 5두품, 4두품까지를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이제 삼국 전쟁 과정에서 귀족제적 골품제가 무너지고 더 확대된 영역과 인민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분 법제로서 양천제가 자리하게 된 것은 신분 제도상의 커다란 발전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분제는 해당 사회를 주도해 온 주체 세력들의 존재 형태, 특질, 사회적 발전 수준과 함께 당시의 사상 및 정치체제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가 변화하는 가운데 그 불평등구조를 반영하는 인간집단에 대한 용어나 개념도 변해 왔으며, 각 신분의 존재 형태는 지역적 특성을 보여 준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신분제의 위계 설명에서 '신을 섬기는 데 몸 바치는' 성직자, '무기로 국가를 보위하는 데 몸 바치는' 귀족, '평화로운 활동으로 국가를 부양하고 지탱하는 '제3신분을 각각 배치했던 것이라든가, 동양에서 인민을 구별할 때 유가적 전통에 따라 사, 서를 구분하여 사는 '식어민'하는 층으로 구별했던 것 등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은 자신의 저서 '반계수록'에서, "토지를 경작하여 조세를 바치는 것은 야인의 일이요, 도를 배워 직무를 닦고 공세를 먹는 것은 사군자의 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한편 전근대사회의 주요 특징을 신분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신분 구분만으로는 한 사회의 불평등체계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학문에서는 사회 불평등체계를 설명할 수 있는 용어로서 신분 이외에 계급, 계층, 지위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해 왔다. 다음에서는 구조화된 사회적 불평등체계를 설명하는 용어 가운데 흔히 쓰이고 있는 대표적인 용어라고 할 신분, 계급 계층의 개념을 간략하게 정리해볼 수 있다.

신분이란 전근대사회 인간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써, 법적 제도와 그것에 따라 규정된 형식적 차별의 외피를 쓴 부류를 말한다. 또한 그것은 혈연관계에 따라 세습되는 폐쇄적 집단으로서 기본적으로 주요 특징은 귀속성이다. 즉, 신분제 아래에서 인간은 타고나면서부터 한 신분에 속하게 되고, 카스트와 같이 폐쇄성이 강고한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기회가 없는 한 그 자손들 역시 동일 신분을 유지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신분 법제로서는 고대 신라의 골품제나 고려, 조선사회의 양천제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신분의 분류나 검출 기준은 혈통에 따라 세습되는, 법으로 규정된 권리와 의무상의 차등에 국한해서 설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 경제적 처지와 그 법제적 표현 간에는 기본적인 부합을 볼 수는 있지만 또한 양자 간에 일정한 굴절과 상치가 있다. 따라서 전근대 사회적 불평등체계 설명에서 신분제적 기준만으로 포괄할 수 없는 계급적 질서 등 여러 영역을 고려하여 신분 질서라는 일원적 설명 틀이 갖는 한계를 보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계급은 일반적으로 근대사회에 들어와 경제적 여러 관계에 따라 규정되는 집단을 지칭한다. 일원론적인 계급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전통에서 발전되어 온 것으로 이해되는데,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의 소유를 둘러싼 여러 관계를 반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과 자본가 계급 등이 대표적인 예로서 대자적인 짝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원시공동체 사회가 붕괴되면서 계급사회가 출현한다"라고 말할 때와 같이 전근대사회의 경우에도 사회적 특권이나 차별체계 등으로 상호 관련을 맺게 되는 커다란 사회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계급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포괄적인 집단을 지칭하며, 이때 계급 구분은 출생에 따라 결정되는 생물학적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 소유관계에 연결되어 있으며, 각 계급은 한 사회 안에서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적 실체로서 계급의식을 공유하는 포괄적 집단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의미에서 계급은 신분이나 카스트와 구별되며, 그 밖에 직업집단이나 인종 집단 등 다른 집단과의 관련 없이도 개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류들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근대사회에서도 사회 전 구조를 포함하는 하나의 체계를 이루는 불평등구조의 짝들을 지칭하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 

계층은 어떤 사회를 관찰할 때 편의상 그 사회의 구성원을 그들이 점하고 있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몇 개의 범주로 구획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계층개념은 근대 경험과학의 전통 위에서 형성된 것으로, 베버가 협소한 의미의 계급개념을 확장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차원의 위계질서를 총망라하는 포괄적이고 다원적인 계층구조의 개념을 발전시킨 기반 위에서 발전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계층은 재산, 권력, 명예, 직업, 교육 등 다양한 변수 중에서 연구자의 필요에 따라 그중 하나 혹은 몇 가지를 선택하여 사회적 지위를 등급 짓는 하나의 설명체계이다. 이렇게 한 사회 구성원을 몇 개의 범주로 중층적으로 보는 경우, 이 사회 범주의 각각을 사회계층이라고 한다. 따라서 계층은 인위적이고 조작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 사회를 다양한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도 있다. 특히 전근대사회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신분이나 계급과 같은 개념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 혹은 한 신분 내의 지위의 차이나 변화 등을 설명할 때 계층이란 용어를 활용할 수 있다.

 

출처 - 한국사 특강

'한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사회의 신분과 계층  (0) 2023.04.06
고대사회의 신분과 계층  (0) 2023.03.13
교종 · 선종의 통합과 지눌 불교  (0) 2023.03.03
동아시아 불교권  (0) 2023.03.01
세계화 시대의 한국 민족주의  (0) 2023.02.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