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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고대사회의 신분과 계층

by 우기부기87 2023. 3. 13.

고대의 신분 법제는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형성 과정에서 서서히 형성되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지배층들은 현실적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여 주변 지역의 여러 세력을 흡수, 통합하거나 정복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지배적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조 설화를 내세우거나 탄강설화 등 혈통을 강조하는가 하면, 고급 신앙으로서 불교에 의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당 사회의 지배체제 정비 과정에서 관료제를 받아들여, 이 틀 안에 지배 세력들을 위계적으로 배치해나갔다. 그리고 연맹의 형태로 포섭되는 층들을 우대하는 한편, 반대로 저항하다가 포로로 잡히거나 집단적으로 정복된 주민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전자는 지배 신분층으로, 후자는 노비 등 천민으로 자리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천민의 형태는 부채 노비로 나타난다. 고조선의 팔조법금 세 번째 항목에,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고, 자속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전을 내야 한다"는 조항에서 보이는 노비가 그것이다. 그런데 노비의 주된 구성은 정복 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포함되는 전쟁포로 및 각종 범죄인들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큰 저항 없이 정복된 지역의 경우라고 할지라도 지배층과 특별히 연계되지 않은 경우 집단 천민으로서 각종 역을 담당하는 층으로 편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초기 국가 형성 단계에서 노비적 존재가 확인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6세기 이전까지는 이들을 포함한 전 주민을 하나의 신분 법제로 묶는 신분제가 성립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전 인민을 대상으로 하는 '양천제'라는 법제적 규범이 사료상 처음 나타나는 것은 대략 6세기 후반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 고대 삼국의 신분 법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조 국가체제 및 관료제 성립 과정에서 주로 지배 신분층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의 재배치를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아직 전 주민을 아우르는 단계까지 이르렀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고대 신분 법제로서 확실하게 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신라의 골품제이다. 골품제는 출생에 따라 정치, 사회적 진출에 특권과 차별을 두었던 엄격한 신분제로서, 왕족과 왕비족에 해당하는 성골과 진골, 그리고 그 하위에 포섭되었던 귀족층으로서 6두품, 5두품, 4두품 등을 설정하고 각각의 관직 진출에 차등을 두고 있었다. 신라의 골품제도는 고대 왕조 국가가 형성, 발전되는 가운데 왕권 아래 기존 각 부족장 세력들을 지배층인 귀족으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세력과 지위에 따라 등급에 일정한 차이를 두기 위해 성립한 것이었다. 이는 신라가 채택하였던 17관등제의 관등 명칭에도 반영되었는데, 찬-간-사-지 등은 족장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골품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을 제한했는데, 예컨대 모든 관부의 장관 이상만이 맡을 수 있었던바, 이에는 진골 귀족만이 임명될 수 있었으며, 차관은 각각 6두품, 5두품 이상이라야 되는 아찬, 나마등의 관등이 맡도록 하고 있었다. 하급 관리인 대사, 사지, 사 등은 4두품 이상에서 임명되도록 규정하였다.

한편 신라 관제에서는 골품에 따라 관등의 제한을 두는 것과 동시에 골품에 따라 공복의 색에서도 차등을 두었으니, 곧 진골은 자색의 관복을, 6두품은 비색, 5두품은 청색, 그리고 4두품은 황색의 관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골품에 따른 차이는 가옥의 규모, 우차의 재료와 장식, 그리고 사용하는 그릇 등 일상생활 전반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골품제가 붕괴되고 관료제가 정착되면서 변화하여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던 지배층과 그렇지 못한 일반민 사이의 큰 계선을 만들었으니, 동양 역사상 공통으로 발견되는 사, 서 간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져서 신라의 골품제는 지배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고, 전 주민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관인의 경우에도 그 대상이 특정 신분으로 제한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고려시대 이후 관인 선발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던 과거제가 일반 양인 전반을 대상으로 했던 시기의 관인과는 차이가 있다. 한편 고구려나 백제의 경우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 관련 내용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보기 어렵지만, 신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출생에 따라 그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신분제 사회의 일반적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고대 신분 법제가 주로 귀족 지배층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지배계급 내에서도 각각 일정한 지위의 차가 있었다. 또한 피지배계급의 경우 평민과 천민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내에서 각 집단의 지위도 일정한 것이 아니었다. 평민의 경우 호민과 일반 평민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일반 평민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이들 일반 평민은 신분적으로는 자유민이었으나 제반 국역을 부담하는 등 국가에 대해 무거운 부담을 짊어졌다. 그리고 사회의 최하층에 노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노비의 공급원은 전쟁포로 등 공동체 외부에서 유입된 경우와 사회 내부에서 여러 가지 경로로 노비로 전락하게 된 경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후자의 경우 대상은 주로 범죄자 및 그 가족, 또는 부채로 인해 충원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쟁 노비, 형벌 노비, 채무 노비 등이 그것이었다. 그 밖에 많은 경우는 아니지만 기근이나 가난 등으로 인해 생계를 위해 스스로 노비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삼국 전쟁 말기에서 통일신라기에 접어들면서 노비들의 지위는 토지와 결부되어 생산적 노동에 종사하는 농노적 지위를 지니는 방향으로 변화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량된 노비들이 거주지에서 어떻게 살았을지, 전사들이 받은 전지는 어떻게 경작되고 관리되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보다 더 주목할 점은 토지와 노비를 묶어서 전공에 대한 보답으로 지급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토지와 결합된 생산 노비는 일반 양인들과 생활상의 조건은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에 대한 신분적 차별은 국가 운영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제 중세사회에 들어와 국가의 지배영역이 넓어지고 인민을 편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짐에 따라 양천제적인 신분 법제가 새롭게 자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지배 신분층을 중심으로 편성된 신분제는 삼국전쟁기간 지배영역이 확대되고 일반 민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이 추진되면서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양천 신분제로 변화되어 나갔던 것이다.

출처: 한국사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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