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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조선사회의 신분과 계층

by 우기부기87 2023. 4. 9.

흔히 조선 사회를 양반사회라고 한다. 중앙집권적 관료제 사회에서 지배층이었던 관인 양반을 중심으로 사회가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특히 관직을 가지고 있는 관인층을 의미했으나 신분적 의미로 쓰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양반 신분이란 표현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신분법제도 기본적으로는 양천제였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의 양인 확보책과 관련하여 양천신분제가 적극 추진되었고, 고려시대에 비해 더 철저하게 준수할 것이 요구되었다. 조선시대의 모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 상의 천인은 오직 노비만을 지칭하였다. "대저 천인의 소계는 모역을 따른다. 다만 천인이 취한 양녀의 소생은 부역을 따른다"는 조항은 혈통에 따른 귀속적 신분으로서 양인과 천인의 신분적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신분법제상으로는 조선 전기 모든 인민은 양인 신분과 천인 신분으로 크게 대별되었다. 그리고 양인 신분 내에서 각 개인은 국역 편제상 각 직역으로 구분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같이 양천신분제를 적극 추진하게 된 데에는 고려 말 권문세족의 사익 추구 현상이 심해지면서 국가의 지배층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고 많은 공민이 사민화되고 있었던 배경이 있었다. 노비 숫자가 급격히 늘어나고 전장을 둘러싼 쟁송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주체들은 사전을 혁파하고, 조선 건국 후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사민을 공민으로 돌려놓고자 하였다. 한편 양천제가 더 철저하게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양인 확보책 마련을 위한 천인에 대한 제한조치 때문만이 아니라, 향리의 지위가 약화되고 부곡 등 특수지역 주민이 성장하여 양인과 거의 같은 지위를 가지게 되는 등 양인 내부에서 제일성, 균질성이 높아진 것도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무엇보다도 신분적 계선은 양 · 천 사이의 선이었다. 천인은 사환권이 박탈되었을 뿐 아니라 양인 · 천인 모두가 지게 되어 있는 신역의 경우, 양인이 지는 역은 공민으로서 봉공의 의무라는 성격을 지닌 것으로 남자에게만 부과되었던 데 반해 천인에게 부과된 신역은 징벌의 의미를 띤 것으로 남녀 노비 모두에게 부과되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양천제 아래에서 양반의 서얼, 특히 천첩자에 대한 차대가 엄하여 과거 응시가 금지되었고, 이 천첩자녀들은 제반 재산상속에서도 적자녀에 비해 심한 차별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 들어와 양천신분제가 철저히 시행되었다고 해서 양인 내부의 각 계층 사이의 계층이동이 자유로웠다거나, 대대로 사환해 온 사족들의 특권이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양인 내부에서도 현직 관리의 자제가 각종 우대를 받았고, 음서의 혜택을 받는 자들이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취재나 녹사직을 거쳐 문반으로 진출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받았던 것이 한 예이다. 그 밖에 현직 관리는 여러 방도로 얻은 품계를 자손은 물론 사위, 조카에게 대신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대가제를 운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양인 내부에서 장리 및 재삼가녀의 자손, 서얼, 세습적 천역자, 향리 등은 사환상의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양인 신분 내의 이차적 신분층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15세기에 자리를 잡게 된 양천신분제는 16·17세기를 거치면서 두 가지 방향에서 변화, 동요의 모습을 보인다. 하나는 양인 내부에서 각 신분, 계층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천인 층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이다. 우선 양인의 경우 사회의 안정화, 보수화 경향으로 기존의 양반층 안에서도 사족과 서족의 족적으로 구분되고, 양반의 모기반이 되었던 품관 층에서도 양반사족과 향리층의 분화가 현저하게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일반 양인이라고 할 평민층의 사회적 진출이 점차 위축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반이 특권층으로 고정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으니, 과거에는 양반 자제가 음서 등 특별대우를 받지 못하고 소속처가 없을 때는 군역에 충당되어야 했지만 이제 그들의 면역의 범위가 넓어졌다. 이 같은 현상은 임진왜란 등 전쟁을 거치고 나서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천인의 경우 16·17세기에 양반들의 노비 증식 욕구와 맞물려 그 숫자가 급속히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노비 소유주들은 경국대전 상의 법 규정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신의 노비를 가지고 공천과 양인을 침범하여 노비 숫자를 늘려나갔다. 결과적으로 공노비나 평민들의 숫자가 줄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현전하는 16세기 양반 가문의 분재기를 보면 비의 소생은 당연히 노비가 되어 분재의 대산이 되고 있고, 노가 취한 양처 소생 역시 노비로 삼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조선 중기 일본 및 청나라와 크게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란은 역설적으로 하층 민인들의 계층이동, 신분상승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마찬가지로 노비제도 역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동요하였다. 전란으로 인한 재정 보충책으로 추진된 납속책이나 전공에 따른 신분상승 조치 등으로 많은 천인과 양인 하층민들의 신분상승, 계층이동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쟁 중에 새롭게 편성된 속오군에 노비가 참여하게 된 것은 지금까지 군역은 공민들만이 담당한다는 원칙을 부정하는 것으로 주목해야 할 점이다.

전쟁 중에는 호적대장과 노비장부가 소실되고 광범위한 노비 도망이 이루어져 양천제의 근간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마침 현종 10년에는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식이 노비가 되어야 했던 종래의 종천법이 오직 어미의 신분에 따르는 종모법으로 바뀌었으며, 수차례의 치폐를 거치다 영조 때 '종모종량''이 확정되고, 비가 부담해야 할 역가도 1필로 감소했다가 사라졌다. 비공이 사라짐에 따라 양천 사이의 차별 일부가 없어진 것이다. 이 종모법을 계기로 노비의 숫자는 점차 줄어들어 19세기 이후 노비제는 실질적인 기능을 상실해 나가게 된다. 종모법에 의해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노양처병산' 소생을 사노비로 확보하여 노비 숫자를 늘려나갔던 노비 주들의 노비 증식욕이 더 이상 채워질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사족 양반들의 경제력도 그만큼 취약해져 갔다.

조선 후기에는 이렇게 양천신분법제가 동요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신분층 내에 여러 계층 사이의 이동도 상대적으로 활발해졌다. 관직에 나가지 않은 양인이 가질 수 있는 최상층 직역인 유학을 모칭하는 현상이 광범위하게 발생하였고, 이 밖에도 평민들은 조선 후기 빈번하게 실시되었던 무과를 이용하여 하급 무반으로 진출하는가 하면, 지방의 교생과 원생으로의 진출이 늘어났다. 그리고 가리 · 장교 등 지방 하급 관리로의 진출도 활발하였다. 아울러 노비들의 납속면천과 도망노비의 자립화가 진행되었다. 물론 이렇게 계층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양반 가운데 평민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이 생기기도 하고 상한으로부터 모욕을 당했다고 수령한테 하소연하는 양반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정반대의 현상으로 문중이 발달하고 양반 가문의 씨족적 결합이 공고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가 하면, 중인 직역이 세습되거나 고위 향리 직을 일정 가문이 독점하는 등 특정 직업의 세습화 현상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모두 변화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노력의 결과였다.

 

 

출처-한국사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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